‘1달러=1유로’ 패리티 임박…美 경제 독주에 늪에 갇힌 세계 경제

1유로의 가치가 1달러와 같아지는 ‘패리티(parity)’ 시대가 임박했다. 거침없는 미국 경제 독주에 ‘수퍼 달러(달러 초강세)’ 현상이 심화하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미 일방주의 정책을 본격 시행한다면, 세계 금융시장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패리티’ 임박…1유로=1.02달러까지 하락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지난 10일(현지시간) 유로화 가치는 전 거래일 대비 0.55% 하락한 1.02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13일 거래된 유로화 값도 장 중 한 때 1.02달러까지 떨어지면서 ‘1달러=1유로’에 근접했다.

영국 런던의 한 환전상 앞에 놓인 시세표. [AP=연합뉴스]

영국 런던의 한 환전상 앞에 놓인 시세표. [AP=연합뉴스]

 
1유로 가치가 1달러 이하로 떨어진 것은 역대 2번뿐이다. 한 번은 닷컴버블이 붕괴했던 2000년 2월~2002년 11월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렸던 2022년 8월~2022년 11월에도 일시적으로 유로화 가치가 패리티(1유로=1달러) 이하로 하락했다. 모두 급격한 금융시장 충격에 달러 가치가 급등하던 시기다. 만약 이번에 패리티 밑으로 유로 값이 내려간다면 역사상 세 번째다.

美 고용지표 쇼크에 불붙은 달러 강세

패리티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다. 달러 강세가 과거 평균보다 더 과도하게 나타나면서, 금융 시장에 부정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어서다. 특히 최근 트럼프 신정부의 10~20% 보편 관세 부과 방침은 유로화 약세에 기름을 부었다. 독일·프랑스 등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20개국) 주요 국가가 저성장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관세 폭탄’이 이들 국가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1유로 가치는 1.121달러에 달했지만,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급락하기 시작해 최근 1.02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9월 고점과 비교해 약 두 달 만에 달러 대비 유로 값은 9%가 빠졌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이런 달러 강세는 최근 미국 고용 지표가 나오면서 다시 한번 더 불을 뿜었다. 10일(현지시간)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지난달 미국의 비농업 신규 일자리는 전월 대비 25만6000명 증가했다. 시장 전망치(15만5000명)는 물론 지난해 2~3분기 월평균 증가 폭(약 15만 명)도 크게 상회했다. 같은 날 발표한 실업률(4.1%)도 전월(4.2%)보다 하락했다. 경기의 후행지표인 일자리 수가 늘자 미국 경기가 여전히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분석에 힘을 얻었다. 이 영향에 미국 Fed도 기준금리 인하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커졌다. 13일 오후 3시 기준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가 예측한 올 3월 기준금리 동결 확률은 77.9%로 미국 고용지표 발표 전(56%)보다 20%포인트 넘게 급등했다. 미국 고용지표 쇼크에 1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값도 전 거래일보다 5.8원 내린 1470.8원을 기록하며 올해 들어 처음 1470원대로 떨어졌다.


기준금리 인하 전으로 돌아간 시장금리
미국 경제의 독주는 달러 값 뿐 아니라, 세계 시장금리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10일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미국 고용지표 발표 직후 전 거래일 대비 0.16%포인트 급등하면서 종가 기준 연 4.76%까지 치솟았다. 심리적 저항선인 연 5%를 위협하는 수치로, 미국 Fed가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하기 전인 지난해 4월 이후 최고치다.

장기 시장금리의 벤치마크(기준지표)인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급등하자, 미국이 아닌 국가들의 시장금리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실제 9일(현지시간) 영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823%를 돌파하면서 2008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독일 10년 만기 국채 금리도 연 2.568%로 지난해 7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일본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4년 만에 최고치인 연 1.196%까지 올랐다.

글로벌 경기 회복의 장애물이 된 ‘환율’·‘금리’

금융 시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양대 축인 ‘환율’과 ‘금리’가 미국 경제 강세에 휘둘리면서, 세계 경제의 부담도 당분간 커질 전망이다. 특히 미국과 달리 코로나19 이후 저성장 국면에 빠진 유로존과 아시아 신흥국들은 높은 달러 가치와 시장 금리가 경기 부양의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한국은행도 올해 1%대 경제성장률 전망에도 불구하고, 환율 불안에 기준금리 인하를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트럼프 신정부의 경제 정책의 근간이 다른 국가 경제를 압박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최근의 미국 경제 독주와 달러 강세는 지속할 수밖에 없다”면서 “트럼프 신정부의 정책 방향이 우선 명확히 정해져야 여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용어사전 > 패리티(parity)
미국 달러와 유로 지페. 연합뉴스

미국 달러와 유로 지페. 연합뉴스

동등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 단어는 1유로와 미국 1달러 가치가 똑같아지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평상시 1유로는 1달러보다 높은 가격을 유지한다. 하지만 달러 초강세, 유로 초약세란 이례적 상황에서만 패리티가 나타났다. 유로화 출범 이후 닷컴 버블 붕괴한 2000년대 초, 코로나19 위기 직후인 2022년 단 2번 있었을 만큼 극히 이례적 현상이다.

패리티가 지속하는 건 세계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선진 경제의 양대 축인 미국과 유럽의 경기와 그에 따른 통화ㆍ금융정책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고용지표 호조에 힘입어 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여전히 침체 상태인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20개국)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 추가 인하를 저울질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