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교수가 보는 탄핵정국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과 체포, 더불어민주당에 의한 연쇄탄핵으로 인한 혼돈의 와중인 13일 최 교수를 만났다. 그는 “민주화 이론을 다시 보고 있다”며 기예르모 오도넬과 필립 슈미터가 1970·80년대 민주화를 반추하며 공저한 『권위주의 통치로부터의 이행(Transition from Authoritarian Rule)』(1988년)부터 꺼냈다. “이행이라면 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해하는데, 권위주의 다음에 나타난 정치체제가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는 거다. 민주주의일 수도 있고 포퓰리즘일 수도 있고 권위주의와 민주주의가 섞인 것일 수도 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얘기”라고 했다. ‘그럼 우린 어떤 민주주의인가’라고 물었더니 “민주주의는 됐는데 정치가 소멸됐다고 할까,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인데 굉장히 정말 위험천만한 민주주의”라고 답했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를 위해선 정치가 필요한데, 정치가 없다는 의미다. 그가 ‘위험천만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일 것이다. 현안부터 물었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어떻게 보나.
“대통령이 정치의 방법이 아니라 군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선거의 정당성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자 위반이다. 정치학적으로 말하면 ‘자체쿠데타(autogolpes·스페인어)’다. 즉 ‘현직 정부가 권한을 위헌적으로 찬탈해 입법·사법 및 기타 정부 기관을 폐쇄하거나 억압하려 한 것’이다.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
실패했다.
“군부를 정치에 동원해선 안 된다는 건 한국 민주주의의 근본적 합의 사항이다. 이를 위반했기 때문에 지지받을 수 없었다. 군을 동원해 행정부와 입법부의 교착상황을 일거에 해소하겠다고 발상했다는 것부터가 현실과 유리된 일이었다. 자해적인 일이고 비합리적인 일이다.”
87체제, 팬덤 정치 등 거치며 악화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을 만난 적 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을 후보 시절 만난 적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균형감이 인상적이다. 더 개혁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많이 받았지만, 자신은 정치인이고 두루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중시했다. 때로 조금 보수적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반대였다. 주한미군 철수가 신념인데 이를 공약할 수 없다는 것을 미안해했을 정도다. 속은 운동권인데 겉은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래선 안 되고 자신이 정치인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대통령은 자유주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자유주의란 서로 간의 가치와 사고, 열정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데, 윤 대통령은 자유주의를 이념화해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일종의 원리주의자로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건 자칫 독단적인 통치자를 만들 위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그런 면모가 더 극대화돼 표출된 게 아닌가 한다.”
민주당의 권력 남용도 문제다.
“여야 간 협의주의 전통이 완전히 붕괴됐다. 과거 여소야대 국회가 다양한 형태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큰 개혁을 해낼 수 있었다면 지금의 여소야대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전면 대립을 통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국회를 낳았다. 균형 없는 무한 견제만 있는 일종의 ‘불모의 흥분상태’가 됐다. 거부권을 남발한 윤 대통령도 문제지만 행정부를 마비 상태로 몰아가려는 민주당도 잘한 것은 없다.”
국가기관들이 논쟁적 선택을 하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검찰·방송·감사원·사법부를 포함해 권력기관의 정치적 독립성은 한국 민주주의의 그저 중요한 과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도 이들이 정치적으로 휘둘리도록 방치된다면, 나중에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여야 어디든 집권해서도 권력기관을 정치에 동원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87체제의 한계란 주장도 많다.
“87년 체제는 정치학자들이 ‘협약에 의한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의 산물이다. 여야가 공존하도록 만든 정치체제로 잘 작동하던 때가 있었다. 연합정치가 지배적이었고 정당 내부도 신진 개혁 세력부터 온건 중도, 합리적 보수까지 다양한 계파가 있었다. 대통령도 다양한 여론에 개방적 비서실을 운영했다. 캠프 정치, 청와대 정부, 팬덤 정치를 거치며 87체제가 나빠진 것이지 애초부터 문제였던 건 아니다. 물론 나빠진 87년 체제를 개선하는 길이 87년 체제로 돌아가는 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정부 형태나 권력 구조를 만드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필요하면 개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양당 독과점 구조에다 위성 정당을 덧붙인 정당정치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계 개편 없이는 개헌도, 정치 행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것이 지금의 한국 정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의회중심제(내각제)와 다당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당제와 독단적 대통령제, 팬덤 포퓰리즘이 결합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대난망”이란 말도 했다.
국가지도자다운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다.
“정치가 나빠져도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의 상황이 오래 지속되니 좋은 정치가가 나올 수 없다. 나올 수 있는 건 권력 장악에만 모든 걸 거는 악성 야심가들뿐이다. 그들은 다양한 시민들을 협력하게 하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조사하고 기소하고 처벌하라는 유사검찰 같은 배제와 적대의 정치를 한다. 정치를 극단적으로 양극화시키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야당 대표가 되고 서로 번갈아 감옥 보내는 게임만 반복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혼란이 오래갈 듯하다.
“대통령직의 파면이든 반헌법적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든 지금 대통령은 몰락이 결정된 상황이다. 이를 마무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이 사라진다고 공존의 정치나 평화의 시민사회가 오는 건 아니다. 지금 같아선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나 유사내전 같은 상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특단의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의의 해결자를 기대할 수도 없다. 한번에 즉각 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차근차근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이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긴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한 목소리만 있는 정당은 전체주의로의 퇴행을 피할 수 없다. 언론과 시민사회, 학계도 토론의 장을 열고 확대해줘야지, 정당 기관지처럼 해서는 안 된다. 지적·정신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지 않으면 어느 사회든 멀리 볼 수도, 길게 갈 수도 없다.”
더 넓게 대표되는 다원민주주의 필요
8년 전 탄핵 이후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이 통합적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한 게 아쉽다.
“8년 전의 촛불집회는 희귀한 기회를 제공했다. 여야는 물론 진보와 보수 시민이 넓게 협력했고 거의 사회적 합의에 가깝게 탄핵과 파면, 조기 대선에 이르는 과정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을 같이한 네 정당이 온건다당제를 잘 운영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양극화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검찰을 앞세운 적폐청산 같은 무리한 일을 안 했더라면 검찰 대통령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국민청원 대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존중했더라면, 방송위원회 문제를 파당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친문과 문빠 중심의 팬덤 정치 대신 다양한 당내 세력이 균형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취임사에서 약속한대로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누가 되든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나눠야 하고, 대통령 비서실의 규모는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며, 비서나 참모보다 국무위원과 내각을 통해 일해야 한다. 캠프 정치, 팬덤 정치처럼 오로지 최고 권력자를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지지자들만의 크고 강렬한 요구만 증폭시켜 동원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앞세워 국회도 정당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넓게 대표되고 참여할 수 있는 다원민주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