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맥 끊긴 자연염색 연구했죠”...86세 여성의 삶 들여다보니

(시계방향으로)1970년 대구 봉덕동 연구실에서 김지희(86)씨의 모습. 김씨는 자연염색 색을 표준화해서 140가지 색 견본집을 만들었다. 자연염색 염료가 되는 재료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시계방향으로)1970년 대구 봉덕동 연구실에서 김지희(86)씨의 모습. 김씨는 자연염색 색을 표준화해서 140가지 색 견본집을 만들었다. 자연염색 염료가 되는 재료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1979년 1년간 일본에 유학을 갔는데 젊은 남자 작가한테 쪽씨 다섯 알을 받았어요. 가지고 와서 땅에 심었더니 처음엔 잘 자라지 않았죠….”

대구 원로 여성 7인의 삶을 기록한 책『대구 원로(元老) 여성』에 담긴 김지희(86) 공예가의 인터뷰 내용 일부이다. 김씨는 6·25전쟁으로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한국의 자연염색을 지켜내고 이를 학문화했다. 일본과 중국에서 자연염색 재료가 되는 식물인 쪽씨 등을 구해와 직접 재배하고 염색했다. 그런 김씨의 연구와 삶을 대구행복진흥원에서 인터뷰했고, 다른 여성 원로들의 이야기를 더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김씨는 “일본에서 쪽씨를 가져오긴 했는데 재배 방법을 잘 몰라서 전통서적을 보고 실습했다”고 했다. 김씨는 쪽풀을 구하러 중국에도 직접 갔다고 한다. 그는 “자연염색 재료가 되는 식물 화분을 하나 몰래 가지고 오면서 얼마나 긴장되던지 비행기가 뜰 때까지는 누가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광복 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입학, 졸업했다. 김씨는 1979년 일본 동경예대 염직과에서 연구원으로 1년 공부하면서 자연염색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예로부터 자연염색은 주로 일년초를 재료로 하는데,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자연염색의 명맥이 끊기게 됐다. 전쟁 이전에도 먹고 살 만한 집에서나 할 수 있었던 탓에 전쟁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은 자연염색을 할 겨를이 없었다. 김씨가 연구를 시작할 땐 80세가 넘는 분이 아니면 염색에 대해 기억을 못 했다고 한다. 김씨는 친정어머니와 대구가톨릭대 원예 담당 직원의 도움으로 어렵게 구해온 종자들을 길러냈다. 그렇게 자연염색 색을 표준화해서 140가지 색 견본집을 만들었다. 80년대 초 염색 관련 한국 최초로 국제 심포지엄을 유치했고, 2005년 팔공산 자락에 자연염색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대구 원로(元老) 여성』 책에 등장한 원로 여성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대구 원로(元老) 여성』 책에 등장한 원로 여성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대구 원로(元老) 여성』에는 김씨 외에도 6명의 원로 여성들 삶이 담겼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문신자(88)씨는 1950년대 미국으로부터 원조받은 우유 가루와 옥수수 가루를 쪄서 학교에서 빵을 나눠 주던 시절부터의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박선애(98)씨는 1968년 이기릉 선생을 만나면서 명맥이 끊길 뻔한 영제시조(嶺制時調)를 이어오고 있다. 영제시조는 조선시대에 확립된 시조를 가사로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경상도 지역의 시조창이다. 박씨는 전국 공연 무대에 올라 영제시조를 널리 알리면서 제자 양성을 위해 요즘도 직접 수업을 하고 있다. 74세에 검정고시 학원을 찾아 합격하고, 78세에 대학 입학, 81세 수필집을 출간한 성영희(86)씨의 삶도 담겼다. 90세까지 무료 진료 봉사를 해온 의사 신동학(97)씨, 1992년 46년 만에 자신의 위안부 경험 증언한 이용수(98)씨 등의 이야기도 있다.  

평교사, 특수학교 교사, 교장, 장학사, 장학관 등 평생을 교육계에 몸 담은 문신자(88)씨.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평교사, 특수학교 교사, 교장, 장학사, 장학관 등 평생을 교육계에 몸 담은 문신자(88)씨.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대구행복진흥원은 기록·자료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대구 여성들의 삶을 취재해 2014년부터 ‘대구여성 생애 구술사’를 매년 발간하고 있다. 2014년 ‘섬유’, 2015년 ‘시장’, 2016년 ‘의료’, 2017년 ‘예술’, 2018년 ‘패션・미용’, 2019년 ‘방문판매’, 2020년 ‘집(家)’, 2021년 ‘교육’, 2022년 ‘차(車)’, 2023년 ‘이주’, 2024년 ‘원로’를 키워드로 대구의 역사와 여성의 삶이 교차하는 부분을 조명하고 있다.  

배기철 대구행복진흥원 이사장은 “이번 대구여성 생애 구술사는 대구 역사를 만들어온 다양한 분야 여성 원로를 구술자로 모셨다”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원로들 덕분에 오늘의 대구 사회가 있는 만큼 격정적으로, 때로는 눈물지으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구술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