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산 담뱃잎, ‘의료용’으로 둔갑시켜 대북 감시망 우회
북-니카라과 협력 강화 핵심 기반으로 평양 룡성구역 떠올라
반년 뒤인 이듬해(2019년) 1월 8일 또 다른 발명국 등재 ‘발명’에서 함철남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폴리프로필렌 섬유용유제〉라는 제목으로, 앞선 의료용 담배와 전혀 다른 주제였다. 폴리프로필렌은 범용 플라스틱의 한 종류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아 주방용품과 밀폐용기 등을 제작하는 데 널리 쓰인다. 이번 논문도 담배련합기업소 소속 연구자들(허상권·윤동욱·리성심)이 공동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로부터 두 달 뒤(2019년 3월) 함철남은 새로 선출된 제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서 다시 등장했다. 687명의 대의원 중 한 명에 불과한 그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북한과 교류를 강화하며 반미(反美) 전선 결속을 도모하는 제3세계 진영에서 함철남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반미 진영에 속한 제3국의 한 외교가 소식통은 함철남을 두고 “깡패(미국)의 저열한 몸부림(제재)을 무력화시킬 비법을 터득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 북한 조선연초수출입상사 소속원으로 근무하다가 평양 룡성구역에 있는 북·중 합영법인 ‘평양백산연초유한책임회사’ 부이사장으로 파견된 게 공개된 첫 직함이다. 이후 담배련합기업소 책임자로 일해 오다가 2019년 제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당선, 공식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우리로 치면 과학자 출신 ‘초선 국회의원’쯤 되는 셈이다.
“미국의 제재 무력화할 비법 터득한 인물”
마르티네스 대사는 지난해 7월 평양지하철(천리마·혁신)도 다니지 않는 외곽지역인 룡성구역을 직접 찾아가 두 사람을 만났다. 이들의 회동 소식은 북한과 교류 중인 제3세계 국가들 외교가에서 화제가 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평양 주재 외국 대사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만남은 김정은 총비서의 허락 없인 불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니카라과대사관이 있는 문수동으로부터 약 15㎞나 떨어진 평양 외곽 룡성지구까지 굳이 찾아가서 두 사람을 만났다는 점에서 대사 개인의 판단에 의한 행동이 아닐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북한과 니카라과의 협력이 강화되기 시작한 계기는 2023년 7월 산디노(Sandino) 인민혁명 승리 45주년 경축행사부터였다. 당시 북한에서 마철수 주쿠바 대사가 니카라과로 찾아가 경축행사에 참석한 뒤 다니엘 오르테카 대통령과 회담했다. 북한과 니카라과는 1978년에 정식 수교했지만, 1994~1995년 양국 대사관을 폐쇄한 이래 최근 재개설에 합의하기 전까지 비상주대사를 통해 외교관계를 유지해왔다. 니카라과는 평양에 대사관을 재개설하면서 동시에 한국 대사관을 폐쇄했다. 표면적으론 재정난을 들었지만, 북한과 협력을 강화하려는 외교 기조 변화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외교가에선 보고 있다.
대북 제재 피해 담배를 ‘의료용’으로 눈속임
북한의 경우 담배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핵심 수단 중 하나다. 북한 자체 상표를 단 담배 제품은 내부에서 소비되기 때문에 외화벌이와 거리가 멀고, 진짜 외화벌이용은 세계에 음성적으로 유통하는 ‘위조 담배’다. 말보로, 던힐 등 글로벌 유명 브랜드로 포장한 위조 담배를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지난 2024년 9월 미국 법무부가 북한의 위조 담배 제조·판매를 도운 혐의로 중국인 진광화를 호주에서 붙잡기도 했다. 미 법무부 발표에 따르면 진광화가 위장 회사를 통해 북한국영담배회사와 거래한 불법 자금 규모는 8430만 달러(약 1240억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담배는 대북 제재 품목으로 지정돼 국제사회에서 엄격한 통제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북한이 제재를 비웃듯 담배 원료를 확보해 여전히 위조 담배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비결이 뭘까. 여기에 앞서 언급한 함철남의 논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바로 담뱃잎을 ‘의료용’으로 포장해 제재를 피하는 기술이다. 의약품의 경우 유엔(UN), 미국, 유럽연합(EU)의 대북 제재 면제를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자금을 책임지는 ‘로동당 39호실’ 입장에서 기호식품인 담배를 의약품으로 탈바꿈한 것은 신의 한 수일 수 있다.
‘윈-윈’하는 방법 찾은 김정은-오르테가
폴리프로필렌은 범용 플라스틱의 한 종류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아 주방용품과 밀폐용기 등을 제작하는 데 널리 사용한다. 담배포장지와 자동차 부품으로도 활용된다. 니카라과는 플라스틱·폴리프로필렌을 수입에 의존한다. 북한과 니카라과는 각자가 필요로 하는 품목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윈-윈’ 관계인 셈이다.
이처럼 북한과 니카라과가 각자 필요로 하는 품목(담뱃잎, 폴리프로필렌)을 서 로 에 게 제공하는 ‘윈-윈’ 구조는 최근 이들의 밀착 행보를 설명할 열쇠다. 특히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은 니카라과와의 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받은 값싼 원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로 폴리프로필렌을 제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니카라과를 이어주는 ‘의료용 담배’와 ‘폴리프로필렌’을 만들어내는 핵심 기지가 바로 마르티네스 주북한 대사가 손수 찾아간 ‘룡성구역’이고, 함철남은 양국 교류와 제재 회피를 설계한 키맨이다. 이 모든 것이 평양 룡성지구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연일 강조하는 ‘자력갱생(自力更生)’과도 코드가 맞아떨어진다.
물론 제아무리 완벽하게 거래를 숨기는 물물교환 방식이라 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금융거래는 불가피하다. 니카라과는 북한과 달리 국제은행간통신협회(스위프트·SWIFT)에 가입돼 있다. 따라서 양국의 직접적인 금융거래는 이론상 불가능하다.
외교관 경험 없는 니카라과 대사의 진짜 임무는?
마르티네스 기용과 동시에 니카라과는 지난해 11월 18일 중국 CAMC그룹과 ‘니카라과 대운하’ 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니카라과 대운하 프로젝트는 본래 2013년 오르테가 대통령이 ‘제2의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하면서 니카라과 정부의 최대 규모 프로젝트로 추진돼왔다. 파나마운하(82㎞) 길이의 3배가 넘고, 총사업비만 500억 달러(약 70조원)에 달해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다. 실제로 2014년 착공식 이후 전혀 진척을 보이지 못하다가 지난해 5월 니카라과 정부가 HKND의 운하개발권을 취소하면서 대운하 프로젝트는 11년 만에 공식적으로 무산됐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운하 사업을 재개한다고 번복한 이유에 대해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외교가에선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 소식통은 “니카라과 운하 건설사업은 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라며 “오르테가 정부도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당초 니카라과 정부도 대운하 사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다.
북한 위조 담배, 니카라과 대운하의 공통 키워드
당초 북한과 니카라과는 중국을 끼고 제3자 거래방식으로 무역을 해왔다. 니카라과가 북한산 강판을 수입하기로 계약하면, 북한은 우선 중국에 대금을 지불하고 중국산 강판을 니카라과로 보낸다. 니카라과는 강판값에 해당하는 담뱃잎을 북한에 보내는 식이다. 이런 거래가 차질없이 진행되려면 세 나라가 긴밀한 협업 관계를 맺고 있어야만 한다. 니카라과가 홍콩 HKND의 대운하 개발사업권을 취소한 지 6개월 만에 중국 회사에 사업권을 넘긴 것은 북한과의 거래 창구가 새로 개설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정황으로 동북아지역의 니카라과 외교관 인사 변동을 들 수 있다. 2024년 5월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이 폐쇄되기 전인 지난 2021~2023년 서울에서 대사 업무를 맡았던 로드리고 코로넬 킨로치 전 주한 대사는 니카라과 3대 외교 명문가 중 하나인 코로넬 킨로치 가문의 일원이다. 같은 시기 코로넬 킨로치 가문 출신 중 니카라과 중앙은행 이사인 마누엘 코로넬 킨로치는 대운하 사업을 총괄했고, 이안 코로넬 킨로치는 주중국 대사로 근무했다. 한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대운하 사업자를 바꿀 무렵 마르티네스 신임 주북한 대사는 평양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2023년 7월 니카라과와 북한의 상호 대사관 개설 합의, 2024년 1월 마르티네스 주북한 니카라과 대사 평양 부임, 4월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 철수, 5월 니카라과-HKND 계약 파기, 11월 니카라과-CAMC 대운하 사업 재추진으로 이어지는 2년에 걸친 니카라과의 대한반도 외교정책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여러 소식통을 통해 교차 확인한 결과, 실제로 마철수 대사와 오르테가 대통령 회담 이후 북한-니카라과 양측은 구체적인 경협 관련 실무 대화를 한동안 이어갔다. 이 대화에는 최선희 외무상과 윤정호 대외경제상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지난해 12월에 열린 제8기 제11차 전원회의에서 각각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중앙위원으로 임명돼 차세대 당내 실세 반열에 올랐다.
중남미 외교가에선 북한과 니카라과의 협력 강화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북한의 대응전략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당초 김정은 정권은 트럼프와 만남을 통해 북·미 관계를 개선하고 대북 제재를 해제 내지 완화한다는 로드맵에 따라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면밀한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제재를 회피할 수단이 마련된 만큼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가 약화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 같은 예측의 근거다.
이 경우, 김정은이 하노이까지 달려갈 정도로 절박감을 보였던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북한이 협상의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국정원은 트럼프가 단기간에 완전한 북한 비핵화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할 경우 핵 동결과 군축 같은 작은 규모의 협상인 ‘스몰딜’ 형태도 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스몰딜에 무게가 실리게 되면 ‘북·미 직거래’ 가능성은 한층 커진다.
북-니카라과 밀월, 북한의 대미 전략에도 영향
제3세계 외교가 소식통은 “우리 자주국(반미 진영)들은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만 3년간 새로운 차원의 단결을 도모했다”며 “미국의 대북 제재는 앞으로 크게 약화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함철남이) 룡성지구에서 대북 제재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라며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 철수는 단순히 한국-쿠바 수교에 대한 대응이 아닌 더 큰 차원의 자주국가들(반미국가들) 간의 연대”라고 강조했다.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