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제 반칙 사건 뭐길래…中, 급기야 "한국 바둑대회 불참"

제29회 LG배 기왕전 우승자 변상일 9단이 최종국 이튿날 열린 시상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커제 9단이 사석을 사석 통에 넣지 않았을 때 상황을 묻자 변상일은 "혼란스러워 집중이 안 됐다"고 대답했다. 사진 프로연우 유튜브 화면 캡처

제29회 LG배 기왕전 우승자 변상일 9단이 최종국 이튿날 열린 시상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커제 9단이 사석을 사석 통에 넣지 않았을 때 상황을 묻자 변상일은 "혼란스러워 집중이 안 됐다"고 대답했다. 사진 프로연우 유튜브 화면 캡처

한국이 주최하는 세계 바둑대회 결승전에서 규칙을 위반한 중국 선수가 벌점 부여에 항의하다가 기권패를 당했다. 지난 23일 LG배 기왕전 결승 최종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세계 바둑 대회 초유의 사태다. 

더 큰 문제는, 반칙을 범한 커제(28) 9단은 물론이고 중국 바둑계가 경기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 데 있다. 급기야 중국위기협회(중국바둑협회)는 2월 초순 열릴 예정이었던 한국 주최 세계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중국 인터넷은 한국 바둑을 비난하는 여론으로 연일 들끓는다. 한중 바둑 교류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LG배 사태 일지
- 2024년 11월 : 한국기원 경기규칙 변경. 18조 6항 ‘사석을 통의 뚜껑에 보관하지 않는 경우. 1차 경고와 벌점 2점 부여’ 신설. 규칙 19조에 ‘경고 2회 누적되는 경우 반칙패 선언’ 명시
- 2025년 1월 20일 : LG배 결승 1국, 커제 승리(백 2집반 승)
- 1월 22일 : LG배 결승 2국, 변상일 반칙승(백 82수). 커제 18수에 1차 반칙, 80수에 2차 반칙. 1차 적발 때 34분간, 2차 적발 때 57분간 커제 항의로 대국 중단
- 1월 23일 : LG배 결승 3국(최종국), 커제 22일과 똑같은 반칙(155수). 커제 “벌점 부여 불복, 재대국 요구”로 2시간 25분간 대국 중단. 커제 경기 재개 거부로 변상일 기권승(백 159수), 결승 종합전적 2승1패로 변상일 우승
- 1월 23일 : 중국위기협회(중국바둑협회), LG배 결승전 결과 인정 불가 성명 발표
- 1월 24일 : LG배 시상식 개최. 커제 비롯한 중국선수단 전원 불참
- 1월 24일 : 중국위기협회, 한국기원에 ‘2월 11일까지 LG배 결승 파행과 관련한 원만한 합의 이루어지기 바란다’ 통보(사실상 재대국 요청)
- 1월 25일 : 중국위기협회, 중국바둑리그 외국인 선수 참가 불가 발표
- 1월 28일 : 한국기원, LG배 사태와 관련한 입장문 발표하고 사과
- 1월 28일 : 중국위기협회, 2월 6일 개최 예정인 제1회 쏘팔코사놀 세계바둑최강자 결정전 중국 선수 불참 발표(중국 선수, 커제 비롯한 4명 출전 예정)
- 2월 3일 : 한국기원, LG배 사태 관련한 긴급 운영위원회 개최 예정
지난 23일 열린 LG배 결승 3국에서 반칙을 선언 당한 커제가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 커제는 끝내 경기에 복귀하지 않아 기권패를 당했다. 바둑TV 유튜브 화면 캡처

지난 23일 열린 LG배 결승 3국에서 반칙을 선언 당한 커제가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 커제는 끝내 경기에 복귀하지 않아 기권패를 당했다. 바둑TV 유튜브 화면 캡처

23일 결승 3국에서 커제는 반칙을 선언 당하자 바로 반발했다. 항의로 대국이 중단된 시간이 무려 2시간 25분이다. 반칙 선언에 불복한 커제가 대국을 재개하지 않아 기권패가 결정되자 중국위기협회는 LG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선수단 전원은 결승 최종국 이튿날 열린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준우승 상금 1억원을 받게 된 커제도 불참했다.

이후로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중국위기협회는 25일 갑자기 중국바둑리그에 외국인 선수가 참가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지난 시즌에는 한국 선수 20여 명이 중국바둑리그에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출전했다. 이어 28일 중국위기협회는 2월 6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 주최 세계바둑대회(제1회 쏘팔코사놀 세계최고기사 결정전) 불참을 선언했다. 이 대회에는 커제를 비롯한 중국 선수 4명이 출전할 예정이었다. 중국의 불참 선언으로 대회는 무기 연기됐다. 

중국으로 돌아간 커제는 제 소셜미디어 프로필을 ‘세계대회 8관왕’에서 ‘세계대회 9관왕’으로 수정했다. LG배 우승자가 본인이라는 주장이다. 아울러 커제는 소셜미디어 라이브방송에서 “한국에서 모욕을 당했다”며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바둑 원로 녜웨이핑 9단, 중국 바둑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마샤오춘 9단 등 중국 프로기사들도 LG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중국 주최 세계대회인 몽백합배를 후원하는 니장건 몽백합그룹 회장 역시 제 소셜미디어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룰이 어디 있느냐며”며 항의했다. 


중국 바둑 매체의 인터넷 댓글도 한국기원과 커제의 LG배 결승전 상대인 한국 변상일(28) 9단을 성토하는 글로 도배됐다. 특히 변상일은 ‘중국 바둑의 공공의 적’이라도 된 양 수모를 당하고 있다. 한 중국인은 “변상일은 묘수도 아니고 속수도 아닌 거수(擧手)로 우승했다”고 조롱했다. 결승 2국에서 커제가 두 번째 반칙을 저지르자 변상일이 손을 들어 심판에게 알린 행동을 겨냥한 비아냥이다. 중국이 주최하는 모든 바둑 대회에서 변상일을 출전 금지해야 한다는 중국인도 많다. 

커제가 제 라이브방송에서 "한국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말하는 장면. 프로연우 유튜브 화면 캡처

커제가 제 라이브방송에서 "한국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말하는 장면. 프로연우 유튜브 화면 캡처

한국 여론은 갈리는 편이다. 한국 국가대표팀 홍민표 감독이 “변상일이 온전히 가져가야 할 명예를 빼앗겼다”는 입장을 밝혔고 김지석 9단도 “커제와 중국바둑협회는 피해자가 아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발표했으나, 중국처럼 프로기사들이 한목소리를 내지는 않고 있다. 이를테면 조혜연 9단은 제 소셜미디어에서 “신규 규칙이 급박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급기야 한국기원은 28일 “이번 일로 한국과 중국이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며 “중국과 긴밀한 대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한 데 이어, 3일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커제는 왜 반칙을 인정하지 못하나
지난 23일 열린 LG배 결승 3국 커제의 반칙 장면. 사석 통에 백돌 5개가 있는데 AI 승률 그래프에는 흑이 따낸 돌이 6개로 돼 있다. 커제가 백돌 1개를 사석 통에 안 넣고 초시계(사진 왼쪽)에 두어서다. AI 승률 그래프를 다시 보면 변상일의 백이 16.3집 앞선다고 나온다. 이 일방적인 바둑을 커제가 재대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둑TV 유튜브 화면 캡처

지난 23일 열린 LG배 결승 3국 커제의 반칙 장면. 사석 통에 백돌 5개가 있는데 AI 승률 그래프에는 흑이 따낸 돌이 6개로 돼 있다. 커제가 백돌 1개를 사석 통에 안 넣고 초시계(사진 왼쪽)에 두어서다. AI 승률 그래프를 다시 보면 변상일의 백이 16.3집 앞선다고 나온다. 이 일방적인 바둑을 커제가 재대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둑TV 유튜브 화면 캡처

사상 초유의 세계 대회 결승전 반칙 승부가 빚어진 것도 모자라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바둑 교류가 위기를 맞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나라의 바둑 경기 규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바둑은 사석도 포함해 계가하지만, 중국 바둑은 바둑판 위의 돌만 계산한다. 하여 중국 선수들은 사석을 아무렇게나 방치한다. 대국이 끝날 때까지 손에 쥐고 있거나 숨기기도 하고, 상대 선수 바둑통에 넣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동이 반복돼 한국 선수가 여러 번 불이익을 당했었다. 

고질과도 같은 문제를 바로잡고자 한국기원은 지난해 11월 사석 관리에 관한 경기 규칙을 수정했다. 신설 규정은 지난해 11월 12일 개최한 삼성화재배부터 적용됐다. 지난 9일에는 한국바둑리그에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출전한 중국 진위청 8단이 관련 규정 위반으로 벌점 2점을 받고 대국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진위청은 승복했으나 커제는 불복했다. 

중국은 한국의 새 규정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국 바둑 규칙을 따르면, 사석은 바둑판 바깥의 것이어서다(커제가 중국으로 돌아간 뒤 제 라이브방송에서 “바둑판에만 집중한 내 잘못”이라고 말한 게 이 때문이다). 중국 바둑계는 “사석 관리는 습관의 영역이지 승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 입장에선 중국의 반발이 솔직히 기분 나쁘다. 중국 주최 대회에서 한국과 다른 규칙으로 인해 한국 선수들이 수차례 손해를 당했으나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식 계가로는 이긴 바둑을 중국식 계가에선 져 경기를 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결과에 불복하지 않았다. 

홍민표 국가대표팀 감독은 “사석 규정은 그동안 한국 룰을 존중하지 않는 중국 선수들과의 분쟁이 20년간 지속하다가 생긴 룰”이라며 “한국 룰로 진행되는 대회에서만큼은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밝혔다. 

신설 규정이 완벽한 건 아니다. 커제가 지적했듯이, 반칙 선언 시점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결승 3국에서 반칙이 선언되자 커제는 “변상일이 둘 차례에 반칙을 선언해 변상일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며 항의했다. 한국 입장에선 황당한 주장이지만, 반칙 선언 시점이 분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결승 2국에선 첫 번째 반칙이 나오고 약 30분 뒤 반칙이 선언됐으며 두 번째 반칙은 변상일이 손을 들어 상대 반칙을 알리자 심판이 개입했다. 세 번의 반칙 선언 모두 시점이 달랐다. 

규정이 신설된 지 3개월밖에 안 된 시점을 고려하면, 반칙의 대가가 가혹하다는 지적도 있다. 반칙이 선언되자마자 경고와 함께 벌점 2점이 부여된다. 초일류 기사의 바둑에서 벌점 2점은 승부와 직결된다. 반칙이 2회 적발되면 바로 반칙패가 선언된다. 

그러나 규칙은 규칙이다. 커제는 물론이고 중국선수단도 개정된 규칙을 알고 LG배 결승전에 출전했다. 규칙을 적용해서 문제가 발견되면 고치면 될 일이다. 한국 규칙을 뒤늦게 문제 삼아 중국이 중국 주최 대회에 한국 선수의 출전을 막고 한국 주최 대회에 중국 선수 불참을 선언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커제는 LG배 결승 3국의 재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칙이 선언됐을 당시 AI 승률 그래프는 ‘변상일 16.3집 우세’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기원이 중국 측 주장대로 재대국을 결정한다면, 중국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닌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현재 바둑은 공인된 국제 룰이 없다. 중국 주최 세계대회는 중국 룰을 따르고, 한국 대회는 한국 룰, 대만 대회는 대만 룰을 따른다.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는 ‘전만법’이라는 응씨배만의 계가법을 사용한다. 응씨배는 초읽기도 없다. 제한시간을 다 사용하면 즉시 벌점 2점이 부여된다. 그러나 어느 선수도 응씨배 룰에 반발하거나 결과에 불복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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