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산청 단성중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산불 임시대피소. 23일 오후 4시 기준 이재민 100여명이 구호형 텐트 33개에서 머물고 있다. 박종서 기자
매일 먹어야 하는 당뇨약도 팽개치고 도망쳤어요. 슬리퍼 바람으로 숨넘어갈 듯이 뛰었죠.
경남 산청군 대형 산불 발생 사흘째인 23일, 단성중학교 체육관에 꾸려진 임시대피소에서 만난 하문구(65)씨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시천면 외공마을에 사는 하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피웠다. 그의 슬리퍼엔 전날 불을 피해 달리다가 묻은 흙먼지가 여전히 묻어있었다. 하씨는 “어제 오후 1시쯤 깜빡 졸고 있었는데 이장이 뛰어와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려 깨웠다. 창문을 열어보니 100m 거리에서 불이 하늘 끝까지 치솟고 있었다”며 “지갑이고 뭐고 챙길 여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시작된 산불이 22일 밤 산청군 단성면 자양리와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경계지점까지 번져 불타고 있다. 송봉근 기자 20250322
하씨의 집은 잿더미가 됐다. 샌드위치 패널을 사용한 건물이라 불에 취약했다. 하씨는 “2시간 넘게 집이 탔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길 건너에서 (소방관들이) 잔불 정리하는 것까지 보고 대피했다”며 “살던 집이 불에 탄 심정은 말로 다 못 하겠다”고 했다.
마을 내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탔지만 화마를 비껴간 건물도 있었다고 한다. 하씨는 “벽돌로 만든 옆집은 그을림 하나 없더라”며 “샌드위치 패널은 다 탔는데 그 집은 용케 안 탔다”고 말했다.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 따르면 벽돌은 불연(불에 타지 않는 성질) 재료에 해당한다.

지난 22일 경남 산청군 한국선비문화원 앞에 한 산불 이재민이 챙긴 이불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이날 오후 4시 기준 단성중 체육관 임시대피소에선 이재민 100여명이 구호용 텐트 33곳에 나눠 머무르고 있었다. 이번 산불로 단성중 체육관을 비롯해 13곳의 임시대피소(휴롬빌리지, 덕천강체험휴양림 등)에서 인근 주민 35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단성중 대피소 입구에는 지역자치단체에서 마련한 생수 등 구호 물품이 2m 넘게 쌓였고, 텐트 앞엔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한 담요와 운동복 등이 담긴 긴급구호 세트가 놓였다. 운동장 한쪽에는 재난구호 급식 차량과 재난현장 회복지원 버스도 마련됐다.
주민 10여명은 대피소에 설치된 TV로 뉴스를 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크를 낀 채 대피소 밖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노년 여성은 30분째 같은 자리에서 산불 관련 뉴스를 시청하기도 했다. 대피소 앞에 바람을 쐬러 나온 이재민들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지 참 답답하다”, “최소 앞으로 2~3일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대형산불 사흘째인 23일 오후 산청군 한 대피소에 모인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30년째 점동마을에 사는 이장 배익선(71)씨는 “바람 때문에 불이 확 번져서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며 “21일부터 한국선비문화연구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불이 번질 위험이 있대서 어제(22일) 단성중으로 다시 피난 왔다”고 말했다. 30여 가구 50여명이 사는 이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70대 이상으로 일부는 거동이 어렵다고 한다. 점동마을 주민 외 이재민들도 다수가 노년층이었다. 산청군청 등은 임시대피소에 지팡이 10여개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날 산림청·경남도 등에 따르면 오후 1시 기준 이번 산불의 산불영향구역은 1362ha이다. 진화율은 65% 수준이다. 산림청 중앙사고수습본부는 헬기 31대, 인력 2243명, 진화차량 217대를 투입해 불길을 잡고 있다. 이 불로 창녕군 소속 공무원과 산불진화대원 등 4명이 숨지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