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보러 다니는 글로벌 제조업체들
경제+
‘땅 잘 보는 회장님’에 대한 재계 야사(野史)는 차고 넘친다. 모 회장님이 짚은 땅마다 허허벌판이 마천루가 되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다. 한데 이제는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세계지도를 펴놓고 입지를 고민한다. 미·중 무역 갈등에 트럼프 리스크, 공급망, 전력과 용수까지,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아져서다. 패권국들이 무역 규제를 설계할 때, 기업은 복잡한 방정식을 풀며 글로벌 제조 투자처를 물색한다. 상부가 정책을 내면 하부는 대책을 짜는, 그야말로 ‘첨단 제조 대(大)임장 시대’다. 더중앙플러스 ‘더 컴퍼니’가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까다로운 조건을 따져본 끝에 주목한 곳이 어딘지 살펴봤다.
이미 세계 5위 반도체 수출국인 말레이시아는 최근 ‘반도체계 중립국’을 자처하고 있다. 미·중 무역 갈등 이슈를 기회 삼아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적인 대안임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 지난달 17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투자 행사에서 웡시우하이 말레이시아 반도체산업협회(MSIA) 회장은 “말레이시아는 미·중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 글로벌 기업의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김주원 기자
동남아에 제조기지가 늘다보니 글로벌 기업들의 ‘우수 동남아 인재’ 확보 전쟁도 치열하다. 말레이시아는 최근 영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 Arm과 협력해 자체 반도체 생산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가 10년간 2억5000만 달러(약 3641억원)를 투입해 Arm의 핵심 IP(설계 지식재산권)를 제공받고 1만 명의 반도체 기술자도 양성하기로 했다.
이들 제조 기지의 경쟁력은 최근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변수는 ‘미국 관세’. 베트남의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지난해 9.4% 증가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으나 향후 유입을 나타내는 FDI 약정액은 3% 감소했는데, 미국 관세로 인한 불확정성 때문이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베트남은 미국을 대상으로 1234억 달러(약 179조원)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 EU, 멕시코에 이은 4위 흑자국이다. 맥킨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베트남이 미국 새 행정부의 관세를 피할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인도, 대안 혹은 계륵=지난 14일 인도 증권거래위원회(SEBI)가 LG전자 인도법인의 기업상장(IPO)을 예비 승인했다. LG전자는 이를 통해 10억~15억 달러(약 2조원 안팎)를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10월 22일 현대차 인도법인도 인도 국립증권거래소에 상장해 33억 달러(약 4조7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삼성전자·현대차·LG전자의 인도 법인은 이제 생산뿐 아니라 자본조달까지 가능한 기지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인도가 ‘중국 대안’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하긴 어렵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김주원 기자
②전력, 물류 문제: 인도의 악명 높은 정전은 유명하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은 타밀나두 등 인도 남부 주정부와 인프라 개선 협력을 논의 중이다. 이에 못지않은 고민이 물류에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정보혁신재단(ITIF)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2000㎞ 배송을 24시간 내 완료하지만, 인도에서는 5~7일이 걸린다. 현지를 체험한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 일반도로가 열악해 좁고 덜컹거리는데, 반도체 같은 첨단 제품을 나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인도는 여전히 긁어보고 싶은 복권에 가깝다. 무엇보다 인도 정부의 ‘메이크 인 인디아’ 정책이 여전히 강력하다. 인도 내 일정 매출(혹은 수출) 목표치 이상을 달성하는 첨단 제조기업에 4~6% 인센티브를 주는 ‘생산 연계 인센티브(PLI)’ 제도를 2020년 시작했고, 앞으로도 연장 및 확대할 전망이다. 현대차(자동차), 삼성전자(모바일), LG전자(가전) 등이 PLI 적용을 받고 있다. 인도 전자정보기술부(MeitY)는 인도에 짓는 반도체 팹에 최대 50% 보조금을 주는 ‘세미콘 인디아’ 프로그램도 2022년 시작했다.
◆ 미국, 왜 다들 텍사스로?=기술의 심장부인 미국은 이제 반도체 ‘제조’에서도 중심이 되려 한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을 앞세운 ‘당근’(보조금 인센티브)으로,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관세 폭탄’이라는 ‘채찍’으로 미국 내 투자 유치에 나섰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도 반도체 태동지인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를 벗어나 텍사스와 애리조나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우선 텍사스. 실리콘밸리의 시조새 격인 휴렛패커드(HP)부터 테슬라, 오라클까지.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텍사스주로 본사를 이전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이어 테일러 지역에 두 번째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글로벌 종합 부동산 서비스 회사 CBRE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2018~2023년 본사를 이전한 465개 회사 중 텍사스로 간 회사가 209개로 가장 많았고 향후 투자 계획도 쏟아지고 있다.
텍사스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기업 친화적이다. 단적으로 소득세와 법인세가 없다. 캘리포니아주 소득세율이 최고 13.3%, 법인세율이 8.84%인 것과 대조적이다. 주변에 텍사스주립대·A&M 등 명문 대학이 위치해 우수한 인재를 고용할 수 있는 점도 장점이다.
미국 남서부 사막 지대에 위치한 애리조나주도 첨단 제조 중심지로 떠오른다. 인텔과 TSMC의 공장이 있다. 풍부한 인력 자원과 낮은 세율 덕분에 실리콘밸리에 대항하는 ‘실리콘 데저트(Silicon Desert)’로 불린다. 세계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는 최근 미국 애리조나에 5개의 제조 시설을 건설하는 데 1000억 달러(약 145조원)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기업들이 계산기를 두드려 터를 잡았지만, 언제든 계약서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 전력·용수 등 인프라가 제때 구축될지도 미지수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생성 AI 기술은 2030년까지 약 84GW(현재 텍사스주 전체에서 사용되는 양)의 전력을 필요로 할 것”이라며 “전례 없는 규모의 전력 수요가 심각한 도전 과제로 떠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는 ‘기업’입니다. 기업은 시장과 정부의 한계에 도전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습니다. ‘기업’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더중플이 더 깊게 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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