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도배했더니 "돈 없다, 배 째"…반년째 못받은 420만원

서울시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건설경기가 침체하며 도배, 타일 등 인테리어 시공기사들이 임금, 공사대금을 못 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사진 속 아파트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서울시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건설경기가 침체하며 도배, 타일 등 인테리어 시공기사들이 임금, 공사대금을 못 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사진 속 아파트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뉴스1

 
30대 도배사 A씨는 지난해 7월 경기 화성시 소재 한 가정집 도배 작업을 사흘간 팀을 꾸려 진행했다. 그런데 원청인 B업체는 대금 420만여원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전화도 피했다. 6개월 넘게 돈이 지급되지 않자 A씨는 업체 사무실로 찾아갔고, 마주한 건 굳게 잠긴 문이었다. B업체 대표는 전화통화에서 “돈이 없는데 어떡하나. 나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라며 되레 화를 냈다.

A씨는 벽지 등에 재료비 300만여원과 함께 일한 도배사 3명의 임금을 온전히 홀로 부담할 처지가 됐다. A씨는 “나뿐만 아니라 B업체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한 인테리어 시공기사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다”라며 “일부는 형사 고소, 민사 소송 등을 제기하고 있지만, 아직도 대금을 받은 경우가 없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건설업계 불황으로 도배사 등 일선 인테리어 시공기사들이 임금이나 공사비 등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고용주 또는 하청 계약을 맺은 원청 측의 자금 사정이 열약해지면서 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것이다.

24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건설업계의 임금체불 건수는 2022년 2925건에서 2023년 4363건, 지난해 4790건으로 2년 새 1.6배 늘었다. 한 도배사는 “시공기사가 1만명 넘게 모인 커뮤니티에서 임금 체불이나 자재비 미지급 등을 호소하는 글이 매일 올라오고 있다”고 전했다.

타일·마루·필름 등 다른 인테리어 분야에서도 대금 미지급에 따른 갈등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문틀·문짝 시공업자 이모(34)씨의 경우 지난해 11월에서 지난 2월 사이 경기 화성과 부산 해운대 두 곳에서 작업을 진행했지만, 총 600만여원을 받지 못하면서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을 신고했다. 도배사들의 민·형사 소송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전직 건설업계 관계자 홍모(70)씨는 “2023년부터 돈을 받지 못한 도배사들을 300명 넘게 도왔다”며 “결국 대금을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줄 돈이 없다’며 배 째라는 식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인테리어 대금 미지급 사례가 급증한 건 건설업계 불황에 따라 전반적으로 현금 흐름이 악화한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고금리로 인해 건설 투자가 감소하고, 부동산 거래도 위축되면서 인테리어 수요 또한 줄어든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4분기 9건이었던 건설사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은 올 1분기에만 22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업계에선 일부 업체가 일감이 적은 상황을 악용해 ‘갑질’하듯 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토로도 나오는 상황이다.

임금체불의 경우 별도 비용 없이 고용부에 진정 등을 제기할 수 있으나 그에 따른 시정명령엔 강제력이 없다는 난점이 있다. 원청이 대금 지급을 거부해 민사소송을 내더라도 인테리어 시공기사 개개인에겐 필요한 법적 비용과 시간이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이에 따라 원청업체 등의 대금 미지급 사례에 대한 관리·감독을 엄격히 강화해야 한단 의견이 나온다. 서울의 한 일선 경찰서 경제범죄팀장은 “해외에는 대금 미지급 자체를 처벌하는 사례가 있으나 한국은 기망(속이는) 행위가 입증돼야 하니 ‘경기가 안 좋은데 어떡하느냐’는 식으로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대금 미지급도 ‘흉기’와 다름없다는 관점에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 전문 조인선 법무법인 YK 변호사는 “피해가 확산하지 않도록 국토부는 상습적으로 대금을 미지급하는 업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추적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