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운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이 서울캠퍼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현동 기자
한때 높아만 보였던 언어의 장벽이 AI(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차츰 허물어지고 있다. 웬만한 영어 문서는 번역 앱으로 읽고, AI봇과 대화하며 외국어를 배우는 게 일상이 됐다. ‘외국어 특성화 대학’으로 자리매김해 온 한국외국어대에게 이런 변화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박정운 한국외대 총장은 중앙일보에 “미래 사회로의 전환을, 상실의 위기가 아닌 전환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총장 취임 직후인 2022년부터 외국어계열 12개 학과를 통합하고 AI융합대학,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대학, 반도체전자공학부, 기후변화융합학부 등을 신설하는 구조개편을 추진했다. 시대 변화와 사회 수요를 반영한 개편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2024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한 AI융합대학의 ‘랭귀지(Language) 앤드 AI융합학부’는 2년 만에 175대 1의 입학 경쟁률을 기록, 학내 최고 인기 학과로 자리 잡았다.
박정운 총장은 “앞으로도 외국어 특성화 대학의 뿌리를 지키면서도 시대가 요구하는 융합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박 총장과의 일문일답.
“AI 기술 발전은 기회…융합 인재 키운다”

박정운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이 본관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AI 언어 번역이 발전하는 가운데 외대의 역할은.
한국외대 하면 외국어 학습이 중심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 우리 대학에서 외국어는 외교, 국제통상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 역량의 하나다. 국제무대에서 요구되는 고도의 외국어 능력과 AI 번역 기능은 수준 차가 크다. 안보가 핵심인 국제외교나 기업 비밀, 오역할 경우 생명이 위험한 의료 통·번역,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문학처럼 기계 번역에만 의존할 수 없는 분야가 많다. 이런 분야에선 여전히 외대가 인재 양성을 선도하고 있다. 물론 다가올 시대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12개 유사학과를 통합하고 8개 첨단 융합학부를 신설했다.
대표적인 신설 학과를 소개해달라.
학생 모집 2년만에 우리학교 간판 학부가 된 랭귀지 앤드 AI융합학부는 외대만의 강점을 살린 학부다. 다양한 언어 데이터를 활용해 AI 시스템을 설계·구현하는 법을 배운다. 졸업 후엔 자동 통·번역, AI 외국어교육 등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 진출할 수 있다. 반도체전자공학부에 들어온 학생은 4년간 외국어와 반도체 관련 지식을 함께 습득할 수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헝가리에서 반도체 분야의 인재가 필요하다면 우리 대학에서 헝가리어를 공부한 반도체전자공학과 졸업생이 최우선으로 투입될 수 있다.

김경진 기자
학부 신설, 무전공 확대 같은 구조개혁에 어려움은 없었나.
구성원과 소송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 개편에 반대하는 교수를 설득하기 위해 강원도 속초까지 찾아간 적도 있다. 결국 답은 소통이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우리 대학이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적 수요와 상관없이 매년 특정 외국어를 가르치는 유사한 학과에서 학생을 100명 넘게 뽑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국 베이징외국어대의 경우는 해마다 과별 모집인원이 달라져, 한 명도 안 뽑는 해도 있다.

박정운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이 서울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17년만의 등록금 인상…올린 만큼 돌려준다”
17년 만에 등록금을 인상했다(5%). 인상분은 어떻게 쓰고 있나.
올린 만큼 돌려준다는 기조로, 학생을 향한 세 가지 방향의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등록금 인상으로 정부 지원이 중단되는 국가장학금(2유형)을 보전하도록 교내 장학금에만 22억원을 편성했다. 등록금 외 다른 재원을 합쳐 노후 강의실 리모델링, 교육 기자재 확충 등에 70억원 이상을 투입할 것이다. AI튜터링 시스템 구축 등 디지털 교육 인프라 고도화에도 2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학교 발전기금도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임기 동안 해외 동문 등을 통해서만 1000만 달러(약 140억원)의 학교 발전기금을 모금했다. 한국외대는 미주, 유럽, 아시아는 물론 튀르키예,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남아공까지 전 세계에 걸쳐 40개에 달하는 해외동문회가 활동하고 있다. 현재도 한국외대 출신이 여러 나라 대사직에 있으며 외교부, 국제기구,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KITA(한국무역협회) 등을 통해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동문이 진출해 있다. 이런 네트워크가 외대만의 자산이다.
☞박정운 총장=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UC버클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모교 영어과 교수로 부임한 후 대외협력처장, FLEX(한국외대가 개발·시행하는 전문어학능력평가) 센터장, 영어대학 학장 등을 맡았다. 지난 2022년 3월 총장으로 취임했다. 담화인지언어학회장, 행정안전부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