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난해 매출이 전년보다 100억원가량 줄면서 대출 만기 연장에 비상이 걸렸다. 이 회사 고위 관계자는 “설비 등 선제 투자로 생산 능력을 제시해야 수주할 수 있는데 당장 매출이 줄었다고 대출 상환을 요구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수도권 소재 반도체 장비 업체는 2년간 공들였던 인수·합병(M&A)을 최근 포기했다. 기존 대출 200억원에 대한 이자 7%도 이미 부담인데. 제2금융권 대출이자는 10%가 넘어 엄두가 안 났다. 게다가 ‘원금 상환을 못 하면 경영권 지분을 내놓으라’는 조건을 요구했다. 이 회사 대표는 “정부가 긴급 수출안정자금을 지원한다고 하더니, 아직 그걸 도입했다는 은행을 못 찾았다”며 “설비 투자를 해야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특성을 기업가치에 반영할 시스템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국내 4대 은행의 기업 무수익 여신 대출 잔액이 지난해 말 기준 2조1465억원으로 역대 최고다. 연합뉴스
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올해 각 계열사 성과 평가 항목에서 재무건전성 지표를 강화했다. 이전에는 일부 관련 부서에만 적용했는데, 마케팅 같은 ‘돈 쓰는’ 부서의 평가에도 포함시켰다. 계열사들은 차입 비용 축소, 사옥 등 보유 부동산 자산 매각, 투자 규모 축소‧보류 등 재무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과 목표를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롯데 임원은 “목표가 막연한 인수‧합병(M&A)은 하지 말고 내실을 다지라는 메시지 자체는 맞다”면서도 “‘돈 쓰지 말라’는 소리로 들려 비용을 줄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재계에선 이번 달을 고비로 본다. 12월 결산법인들의 사업보고서가 공개되는 데다 국내 신용평가사가 신용등급을 새로 매기는 정기평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숨은 부채가 드러나는 데다 성적표(재무제표)가 나쁜 곳은 신용등급 하향으로 자금 조달(채권 발행) 통로가 막힐 수 있다.
건설업계에선 ‘4월 위기설’이 공공연하다. 연초부터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거나 아예 빚을 갚지 못해 법정관리 직전 단계 기업이 늘고 있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올해 들어 신용 등급이나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한 기업은 모두 6곳이다. 또 올해 시공능력 평가 200위 가운데 신동아건설(58위), 삼부토건(71위), 대우조선해양건설(83위) 등 7곳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신용평가 업계 관계자는 “건설뿐 아니라 화학과 2차전지 업황 부진, 전반적인 경기 둔화로 이번에 신용등급 전망치가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되는 기업이 눈에 띄게 늘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부분은 ‘2차 홈플러스 사태’다. 홈플러스처럼 몸집이 큰 기업이 또 법정관리를 택하면, 다른 기업들로 신용 리스크가 빠르게 퍼질 수 있어서다.
실제 홈플러스 사태 이후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중견 기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기준 A3 등급 이하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채권 발행액(만기 1년 미만)은 2142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5812억원)과 비교하면 3분의 1토막으로 쪼그라들었다. 홈플러스 사태 발생 전인 1월(1조1286억원)과 2월(7509억원)만 해도 발행액이 3월의 3배 이상이었다. 신용 등급이 낮은 단기채 시장이 빠르게 얼어 붙고 있단 의미다.

박경민 기자
금융당국도 홈플러스 사태 이후 비우량 등급의 회사채 시장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비우량 중심의 단기채 발행 감소가 아직까진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발 상호관세 부과시 시장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고, 업황이 부진한 업종에선 위기설이 나오는 만큼 채권 시장이 흔들리면 시장안정프로그램 등으로 적극 대응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대기업도 10곳 중 3곳이 전년보다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며 “최근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어 정책금융·임시투자세액공제 확대 등의 금융·세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