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날 0시부터 금융통화위원들의 묵언기간(통화정책방향에 관한 발언 금지)이 시작됐지만, 내부에선 치열한 토론을 벌이는 중이다. 이 총재는 지난해 11월 2연속 기준금리 인하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했지만 12월에 더 큰 돌발 악재가 터졌다. 12ㆍ3 비상계엄 이후에도 윤석열 대통령을 둘러싼 수사 혼선이 이어지면서 가뜩이나 침체된 경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 인하 속도 조절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달러 강세에 기름을 부었다.
국내 경기 상황에 무게를 둔다면 한은이 3연속 금리 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정국 불안의 영향으로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었고, 경제 버팀목이던 수출 증가세도 둔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소비자심리지수가 전월(100.7) 대비 12.3포인트나 하락하면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고, 11월 수출 증가율은 1.4%로 올해 들어 최저치인데다 4개월 연속 감소하는 추세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2기가 공식 출범하면 고관세 정책 등으로 통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선제적으로 금리를 내려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문제는 요동치는 환율이다. 달러당 원화가치는 12월 한달새 50원 넘게 하락해 단기 저항선이던 1450원을 단숨에 뛰어 넘었다. 트럼프 당선 이후 여전한 달러 강세에 국내 정치 불안이 겹친 영향이다. 9일에도 달러당 원화값은 전날 보다 5.5원 하락(환율은 상승)해 1460.5원에 마감했다. 국민연금이 환 헤지(위험 분산)에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는 기대감이 퍼져있긴 하지만 간신히 원화의 추가 하락세를 방어하는 수준일 거란 평가가 우세하다.
이른바 ‘트럼플레이션’도 한은의 결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트럼프의 보편관세가 현실화하면 수입 물가를 자극해 미국의 국내 물가도 다시 높아질 수 있다. 8일(현지 시간) 공개된 12월 FOMC 회의록에서 Fed 위원들은 신정부 출범 이후 물가 재상승을 우려하며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출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현재 연 3%인 기준금리를 낮춘다면 한미 금리 역전차가 커지면서 더 큰 이익을 좇아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가치는 더욱 하락할 수 있다.
워낙 변수가 많다보니 시장에선 금리 전망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시장 전문가는 “솔직히 이번엔 잘 모르겠다”며 “시장 상황처럼 금통위원들의 결정 자체도 변동성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국내 물가나 내수를 본다면 금리를 인하하는 게 맞겠지만, 매파적(긴축 선호) Fed를 의식해 동결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은이 어떻게 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동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인하”라고 했다.
외신들도 한은의 이번 결정을 주목하고 있다. 정치 리스크가 경제를 흔드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금리 결정을 넘어 더욱 책임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니엘 모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8일(현지 시간)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탄핵되고, 경제는 불안하며, 여객기 참사로 온국민이 슬픔에 빠진 상황에서 이제는 한국은행이 나서야 할 때”라며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 누군가 성숙한 어른(the adults in the room)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총재가 사실상 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중앙은행은 위기관리자이고, 책임 문제 때문에 이를 회피해선 안된다”며 “금리 인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유용한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한은이 금리를 인하하든 동결하든 이번 결정의 중대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